“‘온 길 굽어보자 가깝게 여겨지니,
모르는 사이에 그윽한 이곳에 왔네.”
이를테면 김홍도가 그린 「오대산 사고」를 추사 김정희가 쓴 「포쇄하기 위해 오대산에 오르다」와 함께 소개하는 식이다. 오대산 사고는 조선시대 조선왕조실록을 비롯한 역사 기록이나 주요 서책을 보관하기 위해 1568년 설립됐다. 사고에서 가장 중요한 일은 책을 꺼내 말리는 ‘포쇄’인데, 추사 김정희도 왕명을 받고 포쇄하러 이곳을 방문했다가 시를 남긴 것이다. 사고가 위치한 오대산은 명산 중의 명산이라는 찬양을 받기도 했는데, 암행어사 박문수가 오대산 중대에 들러 ‘스님들이 좋은 기와집을 마다하고 머물만하다’라고 감탄한 일화도 함께 소개한다.
그렇다면 정조는 왜 김홍도에게 그림을 그려오라고 했을까? 저자는 정조가 그림으로나마 금강산과 관동팔경을 보고자 김홍도에게 명을 내렸으리라 단언한다. 이제는 갈 수 없게 된 금강산. 정조의 심정이 이해가 가는 부분이다. 금강산은 당대에도 널리 알려진 명산이었다. 동시대의 중국인들도 가보고 싶어 할 정도의 절경이었다. 『화엄경』에 나오는 금강산이 조선의 금강산이라고 믿은 원나라 황후 기씨는 1343년 황제와 태자를 위해 사람을 보내 직접 장엄사를 중건한다. 오늘날에는 이은상이 짓고 홍난파가 작곡한 동명의 가곡으로도 유명하다. 책에는 김홍도가 그린 장안사뿐만 아니라 김응환의 그림도 함께 소개됐다. 두 거장의 그림을 비교하며 감상할 수 있어 흥미를 더한다.
그 외에도 김홍도와 김응환은 같은 장소를 여럿 그렸다. 장안사에서 멀리 않는 곳에 있는 영원암도 두 사람의 그림이 모두 전해진다. 산세가 험하고 진입하기가 어려운 탓인지 김홍도가 그린 영원암은 화폭 속에서도 찾기가 쉽지 않다. 반면 김응환의 그림 속에는 암자가 훨씬 크게 그려져 있고, 소나무 아래 두 사람이 앉아있다. 어쩌면 자신들의 모습을 그려 넣은 것일지도 모르겠다.
금강산에 빠진 많은 이들이 금강산에 대한 글을 남겼다. 문과에 급제해 판서를 지낸 이철보는 1740년 금강산을 유람하고 「동유록」을 썼다. 이철보는 용곡담에서 “걸음마다 되돌아보니 떠나기 어려워, 단풍 속 다음 유람 약속을 남겨두네.”라고 시를 지었다. 김홍도의 그림은 전해지지 않지만, 김응환이 그린 그림이 있어 그 장대함을 느낄 수 있다.
책은 김홍도의 실제 행적을 따라 관동북부와 남부 금강산과 회양 그리고 철원까지 순서대로 다룬다. 사료들을 바탕으로 금강사군첩에 실린 지역들뿐 아니라, 김홍도의 원본은 전해지지 않을 경우 그의 그림을 본뜬 『금강산도권』, 『와유첩』을 토대로 김홍도의 발자취를 섬세하게 조망한다.ㅁ
“‘온 길 굽어보자 가깝게 여겨지니,
모르는 사이에 그윽한 이곳에 왔네.”
이를테면 김홍도가 그린 「오대산 사고」를 추사 김정희가 쓴 「포쇄하기 위해 오대산에 오르다」와 함께 소개하는 식이다. 오대산 사고는 조선시대 조선왕조실록을 비롯한 역사 기록이나 주요 서책을 보관하기 위해 1568년 설립됐다. 사고에서 가장 중요한 일은 책을 꺼내 말리는 ‘포쇄’인데, 추사 김정희도 왕명을 받고 포쇄하러 이곳을 방문했다가 시를 남긴 것이다. 사고가 위치한 오대산은 명산 중의 명산이라는 찬양을 받기도 했는데, 암행어사 박문수가 오대산 중대에 들러 ‘스님들이 좋은 기와집을 마다하고 머물만하다’라고 감탄한 일화도 함께 소개한다.
그렇다면 정조는 왜 김홍도에게 그림을 그려오라고 했을까? 저자는 정조가 그림으로나마 금강산과 관동팔경을 보고자 김홍도에게 명을 내렸으리라 단언한다. 이제는 갈 수 없게 된 금강산. 정조의 심정이 이해가 가는 부분이다. 금강산은 당대에도 널리 알려진 명산이었다. 동시대의 중국인들도 가보고 싶어 할 정도의 절경이었다. 『화엄경』에 나오는 금강산이 조선의 금강산이라고 믿은 원나라 황후 기씨는 1343년 황제와 태자를 위해 사람을 보내 직접 장엄사를 중건한다. 오늘날에는 이은상이 짓고 홍난파가 작곡한 동명의 가곡으로도 유명하다. 책에는 김홍도가 그린 장안사뿐만 아니라 김응환의 그림도 함께 소개됐다. 두 거장의 그림을 비교하며 감상할 수 있어 흥미를 더한다.
그 외에도 김홍도와 김응환은 같은 장소를 여럿 그렸다. 장안사에서 멀리 않는 곳에 있는 영원암도 두 사람의 그림이 모두 전해진다. 산세가 험하고 진입하기가 어려운 탓인지 김홍도가 그린 영원암은 화폭 속에서도 찾기가 쉽지 않다. 반면 김응환의 그림 속에는 암자가 훨씬 크게 그려져 있고, 소나무 아래 두 사람이 앉아있다. 어쩌면 자신들의 모습을 그려 넣은 것일지도 모르겠다.
금강산에 빠진 많은 이들이 금강산에 대한 글을 남겼다. 문과에 급제해 판서를 지낸 이철보는 1740년 금강산을 유람하고 「동유록」을 썼다. 이철보는 용곡담에서 “걸음마다 되돌아보니 떠나기 어려워, 단풍 속 다음 유람 약속을 남겨두네.”라고 시를 지었다. 김홍도의 그림은 전해지지 않지만, 김응환이 그린 그림이 있어 그 장대함을 느낄 수 있다.
책은 김홍도의 실제 행적을 따라 관동북부와 남부 금강산과 회양 그리고 철원까지 순서대로 다룬다. 사료들을 바탕으로 금강사군첩에 실린 지역들뿐 아니라, 김홍도의 원본은 전해지지 않을 경우 그의 그림을 본뜬 『금강산도권』, 『와유첩』을 토대로 김홍도의 발자취를 섬세하게 조망한다.ㅁ
